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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타 거윅이 나아갈 가장 먼 곳

전 세계 핑크색 페인트를 동내며 클리셰를 비튼 야심 찬 영화, <바비>의 감독 그레타 거윅. <작은 아씨들>로 오스카 작품상에 노미네이트되고 <레이디 버드>로 골든글로브상과 전미비평가협회상을 휩쓴 감독이자 <프란시스 하>의 자유로운 댄서. 자신의 커리어를 매번 갱신하며 성큼성큼 나아가는 그를 서울에서 만났다. 그리고 어디로, 어디까지, 어떻게 나아가고 싶은지 물었다.

프로필 by 이예지 2023.07.21
 
 
어린 시절, 당신도 바비 인형을 가지고 놀았나요?
네, 맞아요. 하지만 저희 엄마는 바비 인형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요. 제가 바비 인형을 가지고 노는 것이 맞는지에 대한 확신이 없으셨죠. 그래서 제 바비 인형은 동네 언니들에게서 물려받은 것들이었어요. 영화 <바비>에서 케이트 맥키넌이 연기한 ‘이상한 바비’처럼 아무렇게나 잘린 펑키한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었죠.(웃음) 그때 저는 바비를 비롯한 인형들을 주인공으로 상상력을 발휘해 이야기를 만들곤 했어요. 지금 돌이켜보면, 그것이 제 이야기와 캐릭터 만들기, 즉 글쓰기와 영화 연출의 첫 시작이었던 것 같네요.
 
바비는 수많은 여자아이의 친구이자 핑크의 클리셰, 완벽한 여성성을 대변하는 존재기도 하죠. 바비 소재로 영화를 만들기로 했을 때, 가장 경계해야겠다고 생각한 지점이 있나요?  
물론 있죠. 우선 바비가 실존하는 인간이라면 일어설 수조차 없을 거예요. 신체 비율과 체중, 무게중심 때문에 말이죠. 이런 물리적 불가능성은 우리가 소녀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아니에요. 하지만 64년 동안 바비의 브랜드인 마텔은 많이 발전해왔어요. 특히 2016년부터는 수많은 체형, 여러 다양성을 지닌 여성들의 모습을 담아내기 시작했죠. 전 그런 아이디어에서 영화 <바비>를 시작하고 싶었어요. 이상적인 것이 무엇인지와는 상관없이, 실제로 존재하는 많은 여성을 포괄하려고 했죠. 그럼으로써 바비에 대한 고전적인 비판들과 상호작용하고 싶었어요. 사실 그 비판들은 부정할 수 없는 것이고, 1980년대생인 제가 어릴 적부터 함께해왔던 것이기도 해요. 그래서 저희 어머니도 바비를 좋아하지 않았던 것이고요. 하지만 동시에 저는, 바비의 변화를 통해 세상이 얼마나 진보하고 있는지 정말로 보여주고 싶었어요. 궁극적으로 제가 만들고자 했던 영화는 소녀와 소년들, 특히 여자아이들에게 자신을 가치 있는 사람으로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이미 완벽하다는 걸 알려주고, 그것에 더 이상 다른 억지스러운 어떤 것도 빼거나 더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요.
 
반대로 가장 공들여서 표현하고 싶다고 생각한 점은 무엇이었나요?
영화의 시작. 모든 기어가 서로 맞물려 움직이며 매끄럽게 흘러가는 느낌을 주고 싶었어요. 카메라의 움직임에도 신경을 많이 썼죠. 모든 것이 짜여 있는 안무처럼 움직이며, 항상 적절하게 프레이밍되고, 조명도 정확하게 들어가도록 연출했습니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어우러져야 했어요. 그래야 바비가 “죽음에 대해 생각해본 적 있어?”라고 말하는 순간 영화가 극적으로 깨질 수 있거든요. 그 후로는 연출이 달라집니다. 바비의 세계를 이루던 기어들이 깨지고, 새로운 현실이 펼쳐지죠. 완벽하게 구축돼야 완전하게 해체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제작과 주연을 겸한 마고 로비와의 합이 어땠을지도 궁금합니다. 그녀와 가장 치열하게 의견을 다퉜거나, 혹은 의견이 완벽하게 일치한 부분은 어떤 점이었나요?
마고가 바로 이 영화에 나를 처음 초대한 사람이었어요. 그녀가 바비의 IP를 가지고 있었죠. 저는 당연히 기쁘게 참여했어요. 언제나 마고와 배우로서 함께 일하고 싶었고, 제작자로서의 활약도 인상 깊게 지켜보고 있었거든요. 이 영화의 각본은 처음부터 마고를 위해 쓰여지기 시작했죠. 그리고 각본을 다 쓰고 나니, 다른 감독에게 맡기기 싫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각본을 정말로 사랑하게 됐거든요. 마고는 제가 만들고자 하는 영화의 비전에 완전히 동의했고, 동참했어요. 마고는 제가 강하게 밀어붙이는 지점에 있어 어떤 타협도 하길 원치 않았고, 워너 브라더스에겐 이렇게 영화를 만들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죠.(웃음) 그래서 우리 사이엔 어떤 불일치도 충돌도 없었어요. 제가 겪었던 유일한 어려움은, 마고가 이 영화의 제작자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주연배우에게 영화를 맨 처음 보여주는 시기보다 더 일찍 보여줘야 했다는 점이죠. 저는 배우들에게 영화를 선물처럼 안겨주는 걸 좋아하거든요. 완벽하고 아름답게, 포장 리본이 달린 상태로 말이죠. 그런데 마고는 프로듀서로서 이 작품이 어디까지 왔는지 알아야 했기 때문에 그럴 수 없었어요. 티아라를 건네주고 싶었는데, 아직 제가 용접 중인 조각들을 준다는 건 제겐 어려운 일이었어요. 하지만 극복했죠.(웃음) 마고는 정말로 뛰어난 제작자고, 그녀가 만족할 영화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영화 <작은 아씨들> 촬영 현장에서 그레타 거윅 감독과 엠마 왓슨, 시얼샤 로넌, 플로렌스 퓨.

영화 <작은 아씨들> 촬영 현장에서 그레타 거윅 감독과 엠마 왓슨, 시얼샤 로넌, 플로렌스 퓨.

“바비는 무엇이든 될 수 있어! 켄은 그냥 켄”이라는 카피가 정말 재미있어요. ‘바비’와 ‘켄’의 캐릭터를 어떻게 잡아나갔나요?
바비와 켄의 관계에서 공들여 표현한 점은, 각각 서로에 대한 기대치가 다르다는 거예요. 제가 촬영하면서 가장 좋아했던 장면 중 하나는 켄이 바비에게 잘 자라고 말하며 키스하려다 키스하지 못하는 순간이에요. 바비는 켄한테 가라고 하지만, 켄은 머물고 싶다고 말하죠. 바비는 정확히 “하지만 나는 네가 여기 있길 원하지 않아”라고 말합니다. 바비가 말하는 방식은 나쁘거나 무례하지 않아요. 그저 자신이 생각한 바를 그대로 정확히 전달하는 것이죠. 마고와 라이언 고슬링과 함께 이 장면을 만들어내는 것은 쉽지 않았지만 “나는 네가 여기 있길 원하지 않아”라는 대사를 정확하게 해냈죠.
 
당신은 항상 여성들끼리의 관계와 유대를 흥미롭게 보여줬는데, 이번엔 켄이라는 남성 파트너가 함께합니다. 이를테면 <고스트버스터즈>의 ‘금발 비서 케빈’ 같은 사이드킥인가요?
하하하. 재미있는 질문이네요. <고스트버스트즈> 케빈과는 달리 <바비>에서는 켄도 자신만의 여정을 겪게 돼요. 그도 바비처럼 켄의 권리도 필요하다는 걸 느끼며 스스로의 길을 찾아나가죠. 극단적으로 가진 않으면서요.(웃음) 결국 그는 여성의 좋은 파트너가 됩니다. 켄은 처음부터 전폭적으로 바비를 지지해주는 캐릭터지만, 영화의 마지막을 향해 갈수록 동등한 위치에서 지지를 보내는 법을 알게 돼요. 저희는 그를 늘 ‘자기 실현적인 에너지를 가진 켄’이라고 부르곤 했답니다.  
 
영화 <레이디 버드> 촬영 현장에서 그레타 거윅 감독과 시얼샤 로넌, 로리 멧칼프.

영화 <레이디 버드> 촬영 현장에서 그레타 거윅 감독과 시얼샤 로넌, 로리 멧칼프.

조’, ‘에이미’, ‘레이디 버드’, ‘브룩’, ‘프란시스’, ‘한나’… 당신이 만든 모든 여성, 조금씩 결함이 있지만 당당한 여성을 사랑합니다. 바비는 당신이 만든 캐릭터 중 가장 드라마틱한 변화를 보여주는 여성일 것 같은데요.
바비는 제가 만든 캐릭터 중 가장 어린아이 같은 캐릭터예요. 마고가 역할을 구체화하는 방식도 영향을 미쳤죠. 마고에겐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순수한 모습이 있거든요. 물론 <작은 아씨들>의 자매들에게도 그런 느낌이 있지만, 사실 그렇게까지 어린애 같진 않거든요. 하지만 바비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반짝반짝 빛내며 새로 태어난 것처럼, 모든 것을 처음 배우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죠. 하지만 영화가 진행됨에 따라 그녀는 점점 복잡해져요. 순수하지만 어리석진 않은 모습으로요. 영화의 엔딩 부분에선 바비의 내면세계가 발달한 것처럼 보여요. 제겐 4살짜리 아이가 있는데, 아이들에게 적용되는 마음 이론이 있거든요. 아이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과 다른 정보를 가질 수 있다는 걸 알지 못하다가 3~4살쯤 돼 그것을 깨닫게 되는데, 이것은 매우 유의미한 성장의 순간이죠. 특정한 세계에 갇혀 있던 바비가 세계 밖으로 나와 모두가 나와 같지 않다는 것, 나는 어떤 누구와도 다르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 그와 같은 큰 변화겠네요. 전작들에서 저는 인물 내면에서 나타나는 미묘하고 섬세한 변화에 관심을 가졌지만, 이번엔 확실하게 극적인 변화를 보여줍니다.
 
영화 <레이디 버드> 촬영 현장에서 그레타 거윅 감독과 시얼샤 로넌, 루카스 헤지스, 비니 펠드스타인.

영화 <레이디 버드> 촬영 현장에서 그레타 거윅 감독과 시얼샤 로넌, 루카스 헤지스, 비니 펠드스타인.

인디 장르인 멈블코어 영화 감독에서 규모가 큰 상업 영화 감독으로 차근차근 제대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는 인상입니다. 그때와 지금,  스스로 달라진 게 있다고 느끼는 점은 뭔가요?
저는 모든 일에 같은 방식으로, 같은 태도로 임해요. 첫째로, 감독으로서 제가 무언가를 만드는 이유는 대본이 있기 때문인데요. 전 대본으로부터 모든 게 시작된다고 믿어요. 더 큰 캔버스 위에서 영화를 만드는 것엔 다른 도전들이 따르긴 하지만, 결국 영화를 만든다는 건 본질적으로 같은 거예요. 배우들을 배치하고, 공간을 설정하며, 이 숏이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전달할지 고민하고 결정하는 일은 항상 동일해요. 규모가 큰 상업 영화의 경우 더 많은 스태프와 예산이 도움을 줄 수 있겠지만 본질적으로 그 둘은 다른 작업이 아니에요. 또한 영화를 관람하는 입장에서도 작은 영화든 큰 영화든 영화가 제게 주는 감동 역시 같아요. 본질은 같습니다.  인간다운 감정과 마음으로 연결되는 것.
 
영화 <레이디 버드> 촬영 현장에서 그레타 거윅 감독.

영화 <레이디 버드> 촬영 현장에서 그레타 거윅 감독.

창작자로서 당신이 나아가고 싶은 가장 먼 곳은 어디인가요?
야구 팬들이 환상 속의 야구팀을 만들고 싶어 하는 것처럼, 저는 영화를 만들고 싶어요. 앞으로  제가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시간 동안 시도해보고 싶은 다양한 작품의 목록을 가지고 있죠. 하지만 각각의 작품은 개봉하기까지 3~4년이 걸리기에 제가 만들고 싶은 모든 영화를 제작할 순 없어요. 그래서 저는 영화를 만드는 데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또한 끊임없이 계속될 것이라 생각하지도 않아요. 매분 매초마다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결국엔 하지 못하는 거예요. 영화란 매일매일, 그리고 몇 년이 걸리는 시간의 예술이기 때문이죠. 마치 늘 마감 기한이 있는 잡지사에서 일하는 것과 비슷해요.(웃음) 그런 면에서 저는 이 작업을 끝없이 계속할 수는 없을 거예요. 오히려 그렇기에 저는 계속해서 제가 전하고자 하는 작품들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게 남은 시간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아마도 20년 정도겠죠. 그렇기에 저는 쉬지 않을 거예요. 계속해서 만들고, 나아갈 거예요. 그게 제가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이겠지요.  
 
당신은 무엇을 믿나요?
인간으로서요?
 
<바비> 현장 스틸컷.

<바비> 현장 스틸컷.

인간으로서, 혹은 창작자로서, 혹은 여성으로서.
오! 이건 정말 거대한 질문이네요.(웃음) 저는 불확실성, 그리고 아직 제가 알지 못하는 것을 매우 깊게 믿고 있어요. 물론 알 수 없는 것, 확신할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백지장처럼 불안하고 불편한 느낌을 주죠. 우리는 늘 누군가가 우리에게 어디로 가야 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길 바라니까요. 하지만 저는 이야기를 만드는 감독이자 창작자, 그리고 불확실한 인생을 앞에 둔 한 인간으로서 이러한 알 수 없는 상태에서 흥미로운 것들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그 불편함을 믿어요. 하나의 프로젝트를 마치고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마다 ‘오, 다시 그 불확실성을 마주해야겠군’이라고 생각하죠.(웃음) 3~4년간 한 프로젝트에 매진하는 동안, 그 불확실성은 아이러니하게도 불안을 채워줘요. 그리고 끝나면 또다시 새로운 불확실성이 여전히 제 앞에 도사리고 있죠. 불안하고 두렵기도 하지만, 저는 거기에 좋은 것들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나아갈 수 있어요.
 
<바비> 현장 스틸컷.

<바비> 현장 스틸컷.

 

Credit

  • Editor 이예지
  • Photo by 이우정/영화 <바비> <작은 아씨들> <레이디 버드> 스틸 컷
  • Photo by 워너브러더스 코리아(주)
  • Art designer 장석영
  • Digital designer 민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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