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공과 파멸을 모두 경험하는 인물이 되다! 여성 1인극 [프리마 파시]의 주인공 김신록의 연기론은?
"I AM HERE" 자각하며 나아가는 김신록의 지금, 이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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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스 Annakiki. 귀고리 Hirotaka. 슈즈 Christian Louboutin.
오늘 대화는 ‘I am here’ 이 구절에서 시작하고 싶어요. 스스로를 정의하는 단어를 보내달라고 사전에 요청드렸죠. ‘here’라는 단어를 선택한 까닭은요?
요즘 연습하는 <프리마 파시>라는 연극의 영문 대본에 “I am here”라는 대사가 있어요. 극에서 어떤 큰일을 겪은 주인공이 그 일에 대하여 침묵할 것인가, 맞설 것인가를 고민하며 내뱉는 말이죠. 그러고는 행동을 해나가기 시작해요. 저는 이 말이 어떠한 마음가짐과 행동을 하는 데 있어 주요한 발화점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지금은 공연을 한 달 정도 앞둔 시기기도 한데요, 마치 수능 시험을 한 달 앞둔 수험생처럼, 앞으로 어떻게 해나가야 할 것인가 하는 감정을 느끼고 있는 지금을 대변하는 말이기도 합니다.(웃음)
아무래도 한 달 전이면 연습하느라 한창 바쁘기도 하고 여러 감정이 오가는 때죠?
맞아요. 잘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드는 한편, ‘어떻게 하지? 망하는 것인가!’ 하는 마음이 들기도 하거든요.(웃음) 지금은 그저 답을 열심히 찾아가고 있어요.
연극 무대에 많이 오른 배우에게도 어렵고 헤매는 순간이 있네요.
그럼요. 이 작품은 인터미션 없이 1막과 2막으로 나눠져 있어요. 성공을 좇던 변호사 ‘테사’의 삶을 흔드는 사건이 일어나기 전과 이후의 삶인데, 그 두 세계관이 완전히 달라요. 1막의 ‘테사’는 이성 중심적이고 세상을 야심만만하게 살아가는 사람이지만, 그 이후엔 성폭행 피해자가 되어 완전한 멸망과 파멸을 경험하죠. 몸으로 표현하는 것도 1막보다 훨씬 감각적이고 울퉁불퉁한 움직임을 보여줘야 하고요. 그래서 1막과 2막을 한 번에 거쳐야 하는 것이 어렵게 느껴져요.

드레스 Loewe.
1인극이자 인물의 양극화된 삶과 감정을 표현하는 만큼 연기적인 스킬부터 감정의 표현까지, 굉장히 치밀한 준비가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일단 대본이 90페이지예요. 그 분량을 외우는 것 자체부터 너무나 큰일이죠.(웃음) 전 연습실에서 시간 보내는 걸 좋아하는데, 그 시간 안에는 연습실에 미리 가서 누워 있고, 커피도 한 잔 마시고, 잠시 휴대폰도 보는 것까지 포함돼 있어요. 연습에도 예열이 필요하잖아요. 그런데 요즘은 저와 연습실의 이 관계부터 바꿔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전까지는 연습실이 너무나 편안하고 놀기도 하는, 제게 일종의 해방감을 주는 공간이었다면 이제는 바로 연습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해야 할 것 같아요. 더 치열하게 몰입할 수 있게요.
‘테사’로 몰입해가는 과정에 있는 김신록의 순간도 궁금한데요.
이 작품을 준비하면서는 단순히 연기가 좋아서 그 인물 같아 보이는 것이 아니라 ‘테사’의 삶이, 그가 던지는 화두가 진실성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를 고민하고 있어요. 이건 분명 다른 종류의 진실감인 것 같거든요. <프리마 파시>라는 연극이 1인극이다 보니 ‘테사’라는 인물을 굉장히 치열하게 다루고 있고, 결국 ‘테사’를 통해 한 세계를 대변하는 것과 같아요. 그 힘이 어떻게 하면 이야기 속에 파묻히지 않으면서, 또 너무 계몽적이지 않으면서도 진실하게 관객들에게 다가갈 수 있을까 싶죠.
<프리마 파시>는 한 인물의 삶을 그리지만 관객들은 이 이야기의 단면을 통해 우리가 처한 현실과 마주하게 될지도 모르겠어요.
맞아요. 굉장히 정교하게 쓰인 작품이에요. ‘테사’를 함께 연기하는 이자람·차지연 배우도 굉장히 훌륭하고요. 각자 이 작품을 뚫어내는 방식이 너무 달라 연습하면서 매일 경탄과 좌절을 느끼고 있어요.(웃음) 그만큼 멋진 여자들과 함께 일하고 있다는 생각에 기쁘고, 빌빌대지 말고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느껴요.
김신록, 이자람, 차지연. 세 배우 사이에 얼마나 강렬한 힘이 오갈까 싶어요.(웃음)
힘도 힘이지만, 위기감도 있어요.(웃음) 그렇다고 비교하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위기감이 아니라, 이 배우들 사이에서 나도 관객들에게 좋은 퀄리티의 작품을 보여드리고 싶다는 기분 좋은 자극이죠. 연습 초반에 이자람 배우가 자신이 알고 있는 좋은 것들은 모두 다 나눠주겠다고 말해준 적 있는데, 너무 고마웠어요. 저도 그런 존재가 돼주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저희가 서로 그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이라는 게 참 좋더라고요.
I am here. 스스로 이 감각을 가장 크게 느낄 때는 언제인가요?
연기하는 순간, 그 자체가 아닐까 싶어요. 연극을 앞두고 있으니 여기에 빗대어 이야기한다면, 암전하고 무대에 올라가기 직전의 순간. 조명이 켜지고, 다시 암전되기 전까지는 오로지 제가 다 해내야 하는 거예요. 중간에 헤매든, 대사를 까먹든, 그래서 공연을 망치든 책임감을 가지고 온전히 제 몫을 해내야 하죠. 그러니 지금 여기에 내가 있다는 감각을 가지고 연기에 임해요. 이 태도는 삶에 있어서도 좋은 훈련인 것 같아요. 어렵고 혼란스러운 일이 있을 때, ‘지금 내가 여기에서 뭘 해야 하지? 그 일을 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은?’ 하고 하나씩 자각하면서 정신을 차리는 거죠. 눈을 크게 뜨고, 마음은 차분하게 제가 해야 하는 일에 대해 생각해요.

드레스 Low Classic. 타이, 글러브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연기가 삶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가르침도 주는군요.
결국 연기도 인간의 삶을, 그러니까 한 세계를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그리는 일이잖아요. 덕분에 살아가는 데 있어 좋은 훈련을 하는 셈이죠.
연극 무대로 향하기 직전까지 영화와 드라마에서 수많은 인물로 분했어요. <스위트홈 시즌2·3>의 ‘지반장’부터 <지옥>의 ‘박정자’, <설계자>의 ‘양경진’, 올해 <언더커버 하이스쿨>의 ‘서명주’와 <당신의 맛>의 ‘진명숙’까지, 모두가 다른 색인데 하나같이 짙은 채도를 지녔죠.
돌이켜보면 얼~마나 행운이에요? 정말 감사하죠. 쉬지 않고 작업을 해왔는데, 다 재미있는 역할들을 한 것 같아요. 힘 있고 극단적인 인물이 많기도 했는데 그래서 기억에 많이 남기도 해요.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는 힘과 연극을 할 때 쓰는 힘은 조금 다른 것 같은데, 그 다름과 일상의 리듬을 이리저리 오가며 밸런스를 지키고, 안정적으로 스스로를 이끌고 버티는 법을 배울 수 있었어요.

드레스, 슈즈 모두 Ferragamo. 귀고리 Hirotaka.


그 밸런스 사이에서 영화 <프로젝트 Y>에선 또 어떤 색을 보여줄지 무척 기대돼요. ‘미선(한소희)’과 ‘도경(전종서)’의 선배 ‘가영’을 연기하죠?
<프로젝트 Y>는 두 여성이 자신의 삶을 바꾸기 위해 주체적으로 고군분투하는 이야기예요. 이 시대의 아이코닉한 두 배우 연기를 보는 것만으로 굉장한 쾌감을 주는 작품이 되지 않을까 기대해요. 이 영화는 장면의 구성이나 이야기의 구조를 보면 거친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한소희, 전종서 이 두 배우와 함께 기존에 봐왔던 작품들의 인상을 어떻게 전복시킬 수 있을지를 끊임없이 고민하면서 작업했어요. 새로움을 보여주고자 노력한 여자 배우들의 기세를 기대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웃음)
김신록은 2004년 연극 <서바이벌 캘린더>를 시작으로 차근차근 영화와 드라마라는 매체 연기까지 스스로 자신의 영역을 확장해온 배우예요. 꾸준함과 지구력이 굉장한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전 ‘혼밥’을 굉장히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일을 가는 와중에 잠시 김밥집에 들러서 혼자 후루룩 먹는 걸 즐기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밥만 먹으라고 하면 그건 지루해서 절대 다 먹지 못할 거예요. 김밥을 먹으면서 메시지도 보내고, 다이어리도 정리하고, 아이패드를 켜서 메일도 확인하는 걸 좋아하거든요? 그런 제 모습을 보면 어쩜 이렇게 참을성이 없을까 싶어요.(웃음) 그런데 연기는 20년 동안 해오고 있단 말이죠. 그러니까 아마 연기는 스스로 스테디하게 같은 일이라고 인식하지 않고 있기 때문인 것 같아요. 큰 바운더리에 두고 봤을 때 그걸 ‘연기’라고 부르는 것뿐이지, 저는 매 작품 다른 인물을 연기하면서 계속 한눈을 팔며 다양한 일을 해왔다고 느끼는 거죠. 이런 작품 해보고 싶다, 저 희곡이 궁금하다, 저런 인물도 연기해보고 싶다. 이런 작은 마음들의 연결이 결국 연기라는 이 일을 계속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던 게 아닐까 싶어요.
연기를 시작했을 무렵, 스물다섯의 김신록은 어떤 모습이었나요? 마침 <코스모폴리탄>도 올해 스물다섯 번째 해를 맞이하거든요.
대학교를 졸업하고 이런저런 인턴을 하다가 대학로에서 연극으로 데뷔했어요. 연극영화과 출신이 아니었고, 연극 경력도 없었지만 운 좋게 주인공으로 바로 연기를 할 수 있었죠. 그러니 결과가 뭐 얼마나 좋았겠어요.(웃음) 당시 연출가님이 이 일을 꾸준히 하고 싶다면 연극에 대해 공부를 해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말을 해줬어요. 그 말을 듣고 바로 연극영화과 석사 시험을 준비해, 가을 학기에 한양대를 갔어요. 그렇게 연극과 학업을 동시에 병행하면서 치열한 하루하루를 보냈죠. 연기도 해야 하고, 학교도 다녀야 하고, 돈도 벌어야 하는데 뭐 하나 흔쾌히 되는 일이 없었어요. 그런데도 ‘시켜만 주면 나 잘할 수 있는데!’ 하는 무모하고 막연한 욕심에 휩싸여서 고통스럽기도 했고요. 불운하고 불행하다는 감정에 빠져 있던 시기였죠.

레더 트렌치코트 Jaden Cho. 이너 톱 Hannah Shin.
그 시기를 어떻게 통과해온 것 같나요? 스물다섯 김신록이 했던 고민을 이 세대의 누군가가 또 하고 있을 거란 말이죠.
제 안의 취약성이 극복되기 시작한 건 30대부터인 것 같아요. 아까 저희가 이야기 나누었던 ‘I am here’처럼 스스로 치열하게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아가는 시간을 그때부터 갖게 됐어요. 무작정 ‘시켜주면 잘할 수 있는데!’의 마음이 아니라, ‘뭘 잘할 수 있는데?’, ‘주인공을 시켜주면!’, ‘주인공이 뭔데?’, ‘작품 안에서 대사가 제일 많고, 가장 중심이 되는 것’, ‘그렇다면 주인공이 되기 위해 무얼 해야 하고, 뭘 더 공부해야 할까?’, ‘화술, 발성, 노래?’ 이런 식으로 질문을 촘촘하게 던지고 즐겁게 천착해서 들어갔던 것이 되레 저에게 자유를 준 것 같아요. 뭐랄까 좀 더 코어가 있는 욕망을 갖게 되고, 그걸 성취하기 위한 힘을 쓰기 시작하니까 헛힘을 덜 쓰게 된 거죠. 자연스럽게 자신감도 생겼고요.
<코스모폴리탄>이 지향하는 여성, ‘FUN FEARLESS FEMALE’ 그 자체의 마인드네요. 김신록의 언어로 ‘FUN FEARLESS FEMALE’을 정의해본다면요?
‘Unanswerable’, 답을 내릴 수 없는 존재라 말하고 싶어요. ‘FUN’하다는 건 옳고 그름, 맞고 틀리고를 따지는 시선에서 자유로울 때 ‘FUN’한 감각이 비롯되는 것 같아요. ‘FEARLESS’도 자신이 이렇게 단죄될 거라는 시선에서 자유로울 때 비로소 가능한 상태고요. 쉽게 판단하고 답을 내릴 수 없는 것을 믿는 힘이 ‘FEARLESS’와 맞닿아 있다고 생각해요. 정해진 답이 없는 세계에 저는 더 발을 내딛고 싶고, 그 안에서 무한한 자유와 위로가 있다는 걸 느끼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Credit
- Editor 천일홍
- Photo By 장기평
- Hair 장해인
- Makeup 이아영
- Stylist 김세하
- Assistant 정주원
- Art Designer 장석영
- Digital Designer 김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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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smokore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