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젊은작가상 대상' 백온유 작가가 말하는 '모녀' 관계에 대하여

포근하고 찬란하게, 내 유년기를 수 놓은 엄마와의 '진짜' 추억들.

프로필 by 천일홍 2025.05.23

애틋하고도 지리멸렬한 이름, 母女

초등학생 시절, 학교에 다녀오면 엄마가 직접 만든 쿠키나 머핀이 예쁜 그릇에 담겨 거실 원탁 위에 놓여 있었다. 나는 그 쿠키를 집어 먹기 전 집 안을 둘러보았다. 가만히 귀 기울이며 인기척을 살폈다. 그다음 방문을 하나하나 열어보았다. 대답하지 않을 걸 알면서도 엄마, 아빠를 부르며 화장실도 열어보고 다락방에도 올라갔다. 나는 서재 커튼 뒤에서 부모님을 찾아냈고, 마침내 웃으며 그 품에 와락 안겼다. 우리는 매일 이런 숨바꼭질을 했다.

엄마가 거실에서 꽃꽂이를 하고 있으면 나와 내 동생은 옆에서 그걸 구경하며 꽃으로 반지를 만들거나 목걸이를 만들곤 했다. 기억의 색감과 밝기에 약간의 ‘보정’이 들어갈 수 있음을 부정하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이런 아름답고 아련한 추억들은 내 마음의 방을 밝히는 등불이 됐다. 그리고 이것 또한 내가 경험한 이야기다. 함께 외갓집에 갔다가 기차 시간이 촉박한 가운데 엄마는 내게 동생을 맡겨두고 기차표를 사러 갔다. 당시 초등학교 4학년 정도였던 나는 대합실에 앉아 있다가 문득 기차역 앞에 있던 액세서리 좌판에 눈길을 뺏겨 그곳으로 향했다. 한참 동안 넋을 놓고 구경했던 것 같다. 나와 동생을 찾아 헤매다 기차 출발 시간이 임박했을 때 간신히 우리를 발견한 엄마는 창백해진 얼굴로 다가오더니 인도 한복판에서 나를 때리며 고함을 질렀다. 사람들은 아연한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엄마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살필 겨를도 없이 흥분한 상태였다. 그러고는 나와 동생의 손을 잡아 끌어 기차에 태웠다. 그날의 기억은 여기서 끝난다. 세월이 흐른 뒤, 엄마는 이 사건에 대해 사과했다. 많이 후회했다고, 무엇 때문에 그렇게 이성을 잃었는지 지금으로선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다고, 용서해달라고 했다. 그때 나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 일이 있었냐고.

살면서 단 한 번도 엄마와 언성을 높여가며 싸워본 적이 없다고 하면 친구들은 깜짝 놀란다. “그 정도로 엄마랑 사이가 좋다는 말이야?” 온갖 이유로 싸우고 틀어지고 다시 화해하는 모녀의 애증 관계에 대해서라면 밤을 새우며 사연을 들려줄 지인들이 내 주변에도 많다. 그러나 나는 엄마와 의견 충돌이 있거나 엄마가 견디기 힘들 때, 맞서 싸우기보다는 아주 단호하게 외면하기를 택했다. 그래서 싸움이 성립되지 않았던 것이다.

관계의 변화가 시작된 건 내 기대만큼 엄마가 전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한 순간부터였을 것이다. 시기적으로 보면, 내가 20대 후반에 접어들고, 엄마가 50대 후반에 들어설 때쯤이다. 누군가는 당연한 거 아니냐고 할 것이다. 깨달음이 남들에 비해 늦었던 이유는 나의 엄마가 보통의 엄마들(내 친구들을 통해 경험한 엄마,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경험한 엄마)보다 더 다정하고 더 지혜로웠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엄마의 불완전함, 미숙함을 회피하며 살아왔다. 미숙해서 저지를 수 있는 실수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삶 속에서 고통과 슬픔이 인간을 들이받을 때, 그 영혼이 무너지지 않도록 지탱해주는 것은 아마도 존중받고 대접받았던 기억일 것이다. 엄마는 그런 감각을 누구보다 많이 새겨준 사람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떠올리기도 싫은 치명적인 상처를 입혀 나를 휘청이게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에게 상처를 입힌 후 자신의 과오를 만회하기 위해 엄마는 나름대로 노력했던 것 같다. 하지만 훼손된 어떤 부분은 시간이 지나도 온전히 회복되지 않았다. 나는 어떤 기억을 떠올리면 아득해지고, 어쩐지 처절해진다. 그런 일이 또 반복될까 봐 두려워진다. 어쩔 수 없다. 엄마는 전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어떤 부분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미숙하고 우둔한 모습을 보였다(교만하고 건방진 표현이라는 것을 알지만, 나는 정말 그렇게 느낀다). 그동안 나를 힘들게 한 것은 바로 이런 마음이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엄마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라는 원망. 원망의 감정은 너무나 거대하고 사무치는 것이라 인간이 쉽게 소화할 수 없다. 나는 그 감정을 들추기를 포기했고 간단히 외면하고 회피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늦은 깨달음이 나를 스친 후 알게 됐다. 그럴 수 있는 거였다. 엄마도 인간이니까.

인정하고 나니 나의 태도도 급변했다. 나는 엄마를 계도하고 교정하고 싶어졌다. 엄마가 여태껏 내 삶에 개입했듯, 나 또한 엄마의 삶에 개입하고 싶어진 거다. “요즘에는 그런 말 하면 안 돼. 그런 행동은 해서는 안 돼. 그런 생각은 분명히 잘못된 거야.” 나는 자주 이런 말을 내뱉게 됐다. 내가 옳은 말을 할 때, 엄마는 보통은 수긍했지만 때로는 서운해했고 때로는 울적해하기도 했다. 외로웠을 것이다. 엄마는 소심하게 변명했고 논리에서 밀릴 때면 벌컥 화를 내기도 했다. 자신을 변호하고자 하는 시도가 번번이 실패해 머쓱했을 것이다. 엄마라는 존재에 대한 이해가 과연 우리를 가까워지게 한 게 맞을까? 나는 단단해진 동시에 완고해졌다.

박우란 작가의 <딸은 엄마의 감정을 먹고 자란다>를 읽었을 때, 나는 이 대목에 오랫동안 눈길이 머물렀다. “부모와 자식만큼 조건적 사랑이 있을까도 싶습니다. 희생한 만큼의 보상을 은밀하게 요구하고, 말과 신체로 직간접적으로 호소하기도 합니다. 자식은 엄마의 말과 신체가 보내는 호소를 외면하기 어렵지요.”

우리 관계에서 내 목소리가 커지고, 주장이 강해진 것은 엄마가 자신에 대한 확신이 희미해졌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세계가 역전된 이후, 엄마는 나약해진 자기 자신을 이해해달라고 다양한 방식으로 나에게 호소하기 시작했다. 나는 자주 냉철한 비평가라도 된 양 엄마에게 쓴소리를 했다가, 금세 후회하고 엄마에게 더 잘하겠다고 다짐한다. 잘못을 저지른 후 그것을 만회하려 발버둥치는 것, 과거의 엄마도 지금의 나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물론 똑같지는 않을 것이다. 더 큰 자괴감과 불안감을 안고 어린 영혼을 어르고 보살폈을 것이다.

몇 년 전에 엄마와 이런 토론(이라 쓰고 말싸움이라 읽는다)을 한 적이 있다. 친한 언니가 아기를 낳은 후 나를 집에 초대했다. 언니는 산후 우울증 때문에 한동안은 아기를 쳐다보기도 싫었다고 했다. 나는 언니와 나눈 대화를 엄마에게 들려주며 “엄마는 그런 경험 없었어?” 하고 물었다. 엄마는 자신은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다고 했다. “정상이 아니야, 그건. 엄마는 그럴 수가 없거든. 병원 가야 돼.”

그때 나는 엄마의 말을 격렬하게 비판(어쩌면 비난일지도)했다. 엄마는 그간 사회가 주입한 모성 신화 때문에 부정적인 감정을 은연중에 외면한 것이며, 나는 엄마보다 언니가 훨씬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엄마’라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편협하다고도 했던 것 같다. 엄마는 어리둥절한 눈치였다. 그리고 가만히 30여 년 전의 자신을 톺아보더니 내게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좋기만 했던 것 같은데.”

우습게도 나는 그 말에 안심했다. 그리고 무척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엄마는 그때의 내가 안도했다는 걸 모를 것이다. 티를 안 냈으니까. 딸은 영원히 의심하는 존재인 듯하다. 엄마는 그 의심을 확신으로 바꿀 의무가 있기에 사랑을 증명하는 일에 소홀할 수 없다. 의심하는 일과 안심할 수 있도록 애쓰는 일, 두 가지 모두 상당한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이다. 모녀의 애증은 이 지난한 신경전, 혹은 사랑싸움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언제까지 이 팽팽한 줄다리기를 이어갈까? 둘 중 누구도 기권할 의향이 없으니 아마도 오래도록 우리는 밀고 당기며 울고 웃을 것이다. 그것도 나쁘지는 않다. 그렇다고 믿는다.


Writer 백온유_ 2017년 <정교>로 등단, <페퍼민트> <경우 없는 세계> 등을 썼다. 2025년 제16회 젊은작가상 대상을 수상했다.

Credit

  • Editor 천일홍
  • Writer 백온유
  • Illustration By 최혜령
  • Art Designer 장석영
  • Digital Designer 김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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