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야 한다고, 소리 높여 외칩니다!” 피로한 현대인에게 고막을 때리는 외침은 안 먹힌다. 메신저 소통에 익숙해져 ‘전화 공포증’까지 생긴 요즘 사람들에겐 더욱 그럴 터. 그래서 요즘엔 그 역할을 티셔츠가 대신한다. ‘입어서 하는’ 소통이라니, 그게 뭐지?
1 슬로건 티셔츠 주연 시대를 연 디올 2017 S/S 컬렉션.
2 ‘Nepo Baby’ 이슈에 티셔츠로 정면 대응한 헤일리 비버.
3 발렌시아가 2024 F/W 컬렉션. 제2차 세계대전 중 탄생한 ‘Keep Calm and Carry On’ 슬로건은 현재까지도 수많은 패러디를 낳고 있다.
4 “I♥NY” 로고를 패러디한 발렌시아가 수베니어 컬렉션 티셔츠.
5 찰리 XCX가 착용한 티셔츠는 애슐리 윌리엄스의 것. 기념품 숍에서 구매한 듯한 티셔츠가 트렌드다.
귀를 닫은 이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유일한 방법은, 눈으로 보게 하는 것. 뻔한 배너나 전단지가 아닌 일상에 침투한다면 효과는 더 확실해진다. 슬로건 티셔츠는 이 지점을 노린, 가장 강력한 간판이자 플랫폼이다. 티셔츠란 전세계가 소비하는 만인의 아이템이니까. 만들기 쉽고, 가격도 저렴하며, 격식을 따지지 않아 모두가 입기까지! 때론 정치 캠페인의 소품으로, 때론 상투적인 판촉물로 소비되던 슬로건 티셔츠는 근래에 더욱 진가를 발휘하고 있다. 하이패션 디자이너들이 티셔츠를 런웨이의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화제의 셀렙들이 입 대신 티셔츠로 말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
눈 크게 뜨고 내 말 들어
」
6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가 선보인 “WE SHOULD ALL BE FEMINIST” 티셔츠에 응답하듯, 2017 F/W 컬렉션에 슬로건 티셔츠를 올린 프라발 구룽.
7 페미니스트 티셔츠를 입고 디올 2022 F/W 오트 쿠튀르 컬렉션 피날레 무대에 오른 디자이너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
8 공식 석상에서 미소가 없다는 지적을 받은 빅토리아 베컴이 “FASHION STOLE MY SMILE” 티셔츠를 입고 파파라치 앞에 섰다.
9 오프화이트 2020 F/W 컬렉션의 오프닝을 연 탭 댄서의 티셔츠.
10 영화 내용만큼이나 화제가 된 <챌린저스>의 히트작, “I TOLD YA” 티셔츠.
슬로건 티셔츠를 런웨이의 주인공으로 ‘파격 발탁’한 쇼는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의 디올 2017 S/S 컬렉션. “WE SHOULD ALL BE FEMINIST(우리 모두가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 티셔츠가 등장한 바로 그 컬렉션이다. 이 문구는 소설가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책 제목을 인용한 것으로, 당시 디올 메종 역사상 최초의 여성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발탁된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의 목소리(그는 패션을 통해 여성의 힘을 강력히 외치는 파워풀한 페미니스트다)를 그대로 담고 있었다. 섬세하고 가녀린 디올 레이디의 상반신에 대뜸 입혀진 이 티셔츠는 즉각적인 흥행은 물론 누가 입었는지까지 전부 화제가 됐다. 디자이너 또는 브랜드가 정치적 메시지를 티셔츠로 표현한 시초는 3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펑크의 대모이자 사회 활동가인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1977년 “God save the Queen” 티셔츠로 영국 왕실에 대한 저항을 표현했으며, 1984년 영국 디자이너 캐서린 햄넷은 마거릿 대처 총리를 만나는 자리에 “58% Don’t Want Pershing” 티셔츠를 입고 참석해, 미국 핵 탄도미사일의 유럽 배치를 반대하는 여론을 전했다. 많은 이들에게 노출되는 것을 전제로 한 장면에, 나의 메시지를 새겨 넣는 두둑한 배짱이라니! 그 덕에 누군가는 외면하려던 이슈도 그럴 수 없게 되는 것이다.
2017 F/W 시즌, 프라발 구룽은 디올의 ‘페미니스트 티셔츠’에 화답하는 듯한 런웨이를 선보였다. 그의 신념을 담은 티셔츠가 연달아 등장했는데, “THE FUTURE IS FEMALE” 같은 페미니즘 메시지뿐 아니라 “I AM AN IMMIGRANT”, “LOVE IS LOVE”와 같은 메시지까지 그가 하고 싶은 말을 티셔츠에 모조리 새겨 넣은 컬렉션이었다. 버질 아블로 역시 티셔츠를 통한 정치적 발언을 이어갔다. 버질은 2020 F/W 오프화이트 런웨이를 연 탭 댄서에게 “I SUPPORT YOUNG BLACK BUSINESSES”가 쓰인 티셔츠를 입혔다. 이 티셔츠의 수익금은 버질의 고향인 시카고의 비영리단체 ‘CRED’에 기부되어, 낙후된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패션 산업으로의 취업 기회를 제공해 총기로 인한 폭력을 줄이는 데 쓰였다.
「
대세는 ‘티셔츠 커뮤니케이션’
」
11 캐서린 햄넷은 마거릿 대처 총리와 만날 때 핵 탄도미사일 배치 반대를 외치는 티셔츠를 입었다.
12 1977년 비비안 웨스트우드가 선보인 “God Save the Queen” 티셔츠. 당시 영국 왕실에 대한 저항을 표현했다.
때론 티셔츠가 해명의 창구가 되기도 한다. 크고 작은 이슈에 휘말리는 셀렙들에겐 더더욱! 지난해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베컴>에서 화제가 된 빅토리아 베컴의 인터뷰를 기억하는가? “우리 집은 노동자 계급”이라고 말하는 빅토리아 베컴을 집요하게 추궁해 “(아버지 차가) 롤스로이스였다”고 자백을 받아낸 베컴의 모습을 담은 그 장면 말이다. 이것이 이슈가 되자 빅토리아는 “MY DAD HAD A ROLLS-ROYCE” 티셔츠를 발매하며 유쾌하게 대응했다. 빅토리아는 이런 ‘티셔츠 커뮤니케이션’에 능한 인물인데, 그의 미소 없는 무표정을 지적하는 의견이 많자 “FASHION STOLE MY SMILE” 티셔츠로 위트 있는 항변을 펼치기도 했다. 헤일리 비버는 부유한 부모 덕에 커리어적 특혜를 누린다는 ‘네포 베이비’ 논란에 “Nepo Baby” 티셔츠를 입고 나서며 쿨한 면모를 보였다. “맞아, 나 ‘네포 베이비’야. 그래서?”라며 애써 목청을 높이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티셔츠 문구를 통해 전한 헤일리의 모습에 오히려 비난 여론의 맥이 빠지기도 했다. 티셔츠 커뮤니케이션은 자연스럽게 활자에 시선이 꽂히는 효과를 전제로 한다. 영화 <챌린저스>에서 젠데이아가 입은 “I TOLD YA” 티셔츠는 줄거리만큼 화제가 됐다(이후 영화의 의상 디자이너였던 조너선 앤더슨이 로에베를 통해 상품으로 출시하기도). 파리 올림픽을 기념한 수베니어 컬렉션인 발렌시아가의 “I♥PARIS 티셔츠”는 전설적인 “I♥NY 티셔츠”를 패러디했다. 과일 가게 콘셉트의 티셔츠 숍인 ‘김씨네과일’을 보면 티셔츠 위 문구가 ‘센스의 척도’가 되기도 한다. 작은 티셔츠 숍이 긴 대기줄을 이룰 정도로 사랑받은 비결은 바로 재기발랄한 문구와 프린트였다. 지극히 평범한 티셔츠에 문구 하나만 더하면 누구든 의견을 표현할 수 있고, 일상에서 마주하는 모든 이에게 내 메시지를 ‘로켓배송’할 수 있는 슬로건 티셔츠. 세상에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가장 민주적이면서 잠재력 넘치는 슬로건 티셔츠의 힘에 주목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