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여자도 남자도 아닌, 논바이너리!

태초에 여자와 남자가 있었다는 믿음은 허구일지 모른다. 이분법으로 성별을 가르는 우리의 편협한 사고를 한 뼘이나마 넓히기 위해, 여자도 남자도 아닌 ‘논바이너리’ 지민과 서면으로 마음을 나누었다. 성정체성이란 스스로를 해석하는 저마다의 고유한 방식이라는 것을, “그래서 논바이너리는 남자랑 여자 중에 누구 좋아해?” 따위의 물음은 해로울 만큼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그를 통해 배운다.

프로필 by COSMOPOLITAN 2022.03.12
 
논바이너리(Non-binary)는 남성도 여성도 아닌, 젠더 이분법 바깥에 있는 성별이라 들었어요. 생소한 개념인데, 양성애자와는 많이 다른가요?
둘은 다른 스펙트럼 위에 놓여 있는 개념이에요. 논바이너리는 성정체성의 영역이고, 바이섹슈얼은 성적 지향의 영역이죠. 쉽게 설명하기 위해 성정체성과 성적 지향에 관한 국제 인권 기준인 요그야카르타 원칙(Yogyakarta Principles)을 인용할게요. 성정체성은 “각 개인이 깊이 느끼고 있는 내적이고 개인적인 젠더 경험으로, 이 경험은 태어나면서부터 결정된 성과 일치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으며, 신체에 대한 개인적 의식이나 의상, 말투, 버릇 등 기타의 젠더 표현을 포함”하는 개념이에요. 성적 지향은 “이성, 동성 혹은 양성 모두에게 감정적, 호의적, 성적으로 깊이 끌릴 수 있고 친밀하고 성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개개인의 가능성”의 개념이고요.
 
그렇다면 두 영역의 접점에서 논바이너리이면서 바이섹슈얼인 사람도 존재할 수 있겠네요.
물론이에요. 성정체성을 이분화된 성별로 ‘정체화’하지 않는 동시에 여성과 남성 모두에게 성적 끌림을 느낄 수 있는 거죠. 논바이너리는 내가 누구에게 끌리느냐는 성적 지향과 관계없이, 스스로 성정체성을 이해하는 방식을 말해요.

 
그래서 논바이너리를 남자도 여자도 아닌 제3의 성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죠?
‘제3의 성’이라는 표현이 적절한지 의문이에요. 태초에 남과 여 두 성별만 존재했다는 전제하에, 자연의 순리에서 벗어난 ‘새로운 성’으로서 논바이너리나 트랜스젠더를 사유하는 방식이 아닐까 해서요. 인간의 신체를 사회에서 승인하고 호명하는 방식 자체가 제도로 규정된 것이니까요.
 
듣다 보니 이상적인 여성, 이상적인 남성이라는 개념이 애초에 정말 존재하는지 반문하게 되네요.
인간은 정말 다양한 몸을 통해 저마다의 경험을 하며 살아가잖아요. 논바이너리를 포함한 무수한 성별 정체성은 제3의 무언가가 아닌 각각의 고유한 무언가로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스스로 논바이너리라고 선언하기 전에는 자신의 성정체성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었어요?
논바이너리라는 개념을 접하기 전에는 ‘트랜스젠더 언저리에 있는 어떤 정체성 같은데, 이것도 나에게 딱 들어맞지는 않는 것 같아’ 정도로 인지했던 것 같아요. 당시 대한민국 사회에서 트랜스젠더가 재현되는 방식이 성별 이분법에 부합하는 형태에 가까웠기 때문이죠. 그마저도 남성에서 여성 혹은 여성에서 남성이 되는 의료적 전환을 거쳐야만 ‘진정한 트랜스젠더’로 인정받는 식이었고요. 그 사이 어디에서도 저를 설명할 마땅한 언어를 찾지 못했어요.
 
젠더 퀴어 정도로 스스로를 인지하다 개념이 확장된 경우인가요?
개념이 ‘확장’된다는 표현은 다양한 성소수자의 무수한 정체성과 정체화 과정을 설명하지 못해요. 저만 하더라도 언제 딱 정체화가 이뤄졌다고 표현하기 어려우니까요. 그래서 저는 “유아기 때는 어땠고, 청소년기 때는 어땠기 때문에 왠지 내 정체성은 이게 아닐까 고민했다” 같은 방식의 서술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아요
 
그래도 논바이너리로 커밍아웃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있지 않았을까요?
어떤 ‘계기’가 있었다기보다 지금 제가 가진 몸과 이 몸으로 겪은 경험들, 디스포리아(성별 불일치), 관계 맺음 등 다양한 영역에서 ‘아, 나는 여성이나 남성이란 단어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사람이구나, 성별 이분법에 부합하지 않는 존재구나’라고 느낀 경험들이 축적된 결과인 것 같아요. 제 몸의 가슴이나 골격, 성기 등에 위화감을 느꼈던 시기도 있었고, 제 의도와는 무관하게 남성이나 여성으로 ‘패싱’당하는 과정에서 불편함이나 불일치감을 느끼는 순간도 꾸준히 있었죠.
 
연애할 때는 어때요? “난 남자지만 여자도 좋고 남자도 좋아”보다는 “난 남자도 여자도 아니니 모두 사랑할 수 있어”의 관점인가요?
제 경우에는 스스로를 “트랜스젠더 언저리의 무언가”라거나 “논바이너리 비스무리한 어쩌구”라고 설명해요. 명확한 정의를 내릴수록 맞지 않는 옷을 입는 느낌이어서요. 물론 논바이너리 중에는 오히려 명확한 정의를 통해 자신을 설명하는 사람도 있어요. 인간의 정체성은 본질적이거나 고정된 개념이 아니라 다양한 스펙트럼 위에 찍힌 무수한 점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그 스펙트럼 속에서 우리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스스로를 해석하며 살아갈 뿐이고요. 저처럼 나만의 고유한 정체성이 ‘논바이너리’라는 포괄적인 용어로 정체화된 다른 이들과 서로 만나기도 하면서요.
 
같은 우산을 쓴 것처럼요?
그 안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을 정체화하는 거죠. 이렇게 생각하는 게 퀴어를 퀴어스럽게 이해하는 방식이 아닐까 해요
 
논바이너리는 상대가 여성이냐 남성이냐, 혹은 상대의 성정체성과 성적 지향도 고려하나요?
논바이너리로 본인을 정체화한 사람들은 여성을 좋아하기도, 남성을 좋아하기도, 성적 끌림을 느끼지 않기도, 모든 성별을 좋아하기도 하는 등 각자 다양한 섹슈얼리티를 실천하고 있어요. 미국의 젠더 이론가 주디스 버틀러의 논지처럼 저는 사회가 이성애 중심주의를 굳건히 유지하면서 이성애를 자연화, 정상화하기 위해 여성과 남성이라는 성별 이분법을 ‘자연적인 질서’로서 공고히 하려 한다고 생각해요. 많은 사람이 “그럼 트랜스젠더면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 여자를 좋아하는 거야? 논바이너리는 그래서 누구 좋아해?”라는 질문을 하게 되는 것도 그래서일 테고요. 그렇기 때문에 “논바이너리는 어떤 끌림을 느껴?”는 바람직한 질문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지민 씨는 폴리아모리(다자연애주의자)이기도 한데요, 폴리아모리와 논바이너리는 연관된 개념일까요? 
둘이 연관성이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폴리아모리 관계를 맺으면서 제가 논바이너리이기 때문에 마주하는 순간들이 있긴 해요. 가령 제 성별을 여성이나 남성으로 ‘패싱’해 저와 애인의 관계를 이성애 관계나 동성애 관계로 쉽게 단정 짓는 사람, 혹은 제가 논바이너리라는 걸 알게 됐을 때 제 애인의 성적 지향을 뭐라고 불러야 하는지 궁금해하는 사람을 마주하는 것처럼요(그걸 왜 남이 궁금해하는지는 모르겠지만요).
 
사랑하는 상대가 남성일 때와 여성일 때, 당신은 각각 어떤 모습의 연인이 되나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저에게는 성별이 중요한 요소로 작동하지 않아요. 굳이 명명하면 팬섹슈얼(성별을 구분 짓지 않는 범성애자)에 가깝죠. 물론 어떤 성별로 살아왔고, 어떻게 정체화했느냐에 따라 일정한 행동 양식이나 경향이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을 부정하는 건 아니에요. 그렇다고 특정 성별의 젠더 표현에 제가 더 끌림을 느낀다는 식의 유의미한 공통분모는 찾지 못하겠어요.
 
지민 씨에게 사랑은 어떤 의미예요?
제가 ‘논바이너리여서’ 품고 있는 특별한 사랑의 정의는 없어요. 그저 지금껏 맺어왔던 관계들과 거기서 도출된, 사랑에 대한 나름의 상을 가지고 있을 뿐이에요. 저에게 사랑은 한 문장으로 정의되기보다 ‘기꺼이’와 ‘서로 돌봄의 노동’, ‘서로의 세계를 허물고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일’ 이런 것들의 합으로 다가오죠.
 
논바이너리는 그(he) 또는 그녀(her)가 아닌 ‘그들(they)’이라 불리기를 자처하고, 이름 앞에는 미스(Miss), 미스터(Mr.)가 아닌 ‘Mx.’를 쓴다고 들었어요. 그 밖에 논바이너리의 가치가 드러나는 행동이 있다면요?
“빨간색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들 고유의 가치나 행동이 존재하는가”를 묻는 느낌인데, 성별 이분법이 담지 못하는 영역에서 새로운 권리를 발견하고 이야기하는 부분은 있어요. 예를 들어 외출해 화장실을 가야 할 때 논바이너리들은 다시금 성별 선택을 강요당하죠. 그래서 성 중립 화장실, 혹은 모두를 위한 화장실에 관한 논의도 있고요. 이는 다른 공공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에요. 주민등록번호부터 학교, 병원 등 다양한 영역에서 논바이너리로 정체화한 사람들이 겪는 차별과 배제, 그로 인한 가난과 질병 등이 존재하죠. 이는 사회적 차별의 결과에 가깝지, 논바이너리들이 가진 고유의 가치나 행동은 아니에요.
 
샘 스미스, 우타다 히카루 등 논바이너리임을 커밍아웃한 유명 인사도 많은데요,  존재만으로도 마음의 응원이 되는 논바이너리가 있나요? 
그보다는 친구들의 존재가 더 힘이 돼요. 비단 논바이너리뿐 아니라 사회의 각 영역에서 다양한 이유로 차별받고 밀려나는 존재들이 꿋꿋이 살아 있다는 사실, 그리고 이들이 (인권 기록활동가 홍은전 선생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차별받는 사람에서 저항하는 사람’이 되는 순간을 목격할 때 오늘 하루를 살아갈 힘을 얻기도 합니다.

Credit

  • editor 하예진
  • digital designer 김희진

MOST LIKED ARTICLES